"챗GPT로 한국어 시나리오 만들어" 캄보디아 조직도 한국 노린다

올해 상반기 보이스피싱 피해 액수가 6421억원으로 15일 집계됐다. 작년 한 해 피해 액수가 8545억원으로 최고치를 기록했었는데, 이 추세라면 보이스피싱 피해액 ‘1조’ 시대가 올해 현실이 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해 1인당 보이스피싱 피해액도 처음으로 4000만원을 돌파했다. 전년보다 73% 늘어났다.

주식 투자 열풍을 악용한 ‘불법 투자 리딩방’ 사기, 사랑인 척 위장한 사기 행각을 뜻하는 ‘로맨스스캠’ 등과 비교할 때 보이스피싱은 비교적 과거 범행 수법이었지만, 최근 AI(인공지능) 기술을 등에 업고 급속도로 번지고 있다. 실제와 똑 닮은 목소리와 영상을 뚝딱 만들어주는 생성형 AI가 보이스피싱 범죄에 날개를 달아줬다. 경찰 관계자들은 “AI가 사람의 목소리와 모습은 물론, 말투·억양까지 정확히 재현할 수 있게 되면서 가족들도 구분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왔다”고 했다.

◇AI 기술로 보이스피싱도 고도화·국제화

생성형 AI 기술은 소셜미디어에 올라온 사진 몇 장과 동영상 속 목소리 30초 분량 정도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고 목소리를 복사할 수준까지 왔다. 작년 5월 부산에선 AI 기술로 복제한 목소리 ‘딥보이스’를 활용한 보이스피싱 범죄가 적발됐다. 이 사건 피해자인 60대 여성 B씨는 딸 번호로 “친구 보증을 섰는데 친구가 연락이 안 돼서 내가 잡혀 왔다”는 전화를 받고 근처 은행을 찾아 2000만원을 인출했다. 그러나 경찰 수사 결과 B씨에게 걸려온 전화 속 딸 목소리는 AI를 활용해 만든 소리였다.

작년 10월 중국인 A씨의 스마트폰에 영상 하나가 전송됐다. 영상엔 한국으로 여행을 떠난 20대 딸이 어딘지 모를 곳에 감금돼 손발이 묶인 채 울먹이고 있었다. 여러 번 재생해 봐도 며칠 전 다녀오겠다던 딸 모습이 분명했다. 영상을 전송한 이는 자신을 밝히지 않고 “딸 얼굴을 온전히 보고 싶거든 당장 합의금을 준비하라”고 했다. 하지만 딸은 문제없이 여행 중이었다. 제주 서부경찰서가 확인한 결과 딸이 소셜미디어에 제주도에 도착한 뒤 올린 사진과 설명 등을 바탕으로 AI를 통해 만든 딥페이크 영상이었다. 어찌나 정교한지 형사 일부는 혹시 딸이 부모로부터 돈을 받아내기 위해 친구들과 자작극을 벌인 게 아니냐는 의심도 했다고 한다. 한국 경찰이 보이스피싱 범죄에 딥페이크가 활용된 것을 확인한 첫 사례였다.

AI 기술로 영상·음성 조작이 가능해지자 국제 범죄 조직들은 잇따라 한국 국민을 타깃으로 보이스피싱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 캄보디아 등 동남아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는 한 사기 범죄 조직원은 본지 취재 과정에서 “중국인 조직원들도 이젠 ‘챗GPT’나 ‘딥시크(중국의 AI 모델)’로 직접 한국어 시나리오를 만든다”고 했다. AI 기술 발전에 따라 해외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보이스피싱 사기를 치기가 한결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지난 4월 울산에서도 딥페이크를 활용해 만든 가상 인물로 이성 100여 명에게 접근해 총 120억원을 가로챈 범죄 조직원이 경찰에 체포됐다. 이들도 캄보디아에 거점을 두고 활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정보 유출 많은 20대 피해자 급증

그간 국내 보이스피싱 범죄의 주 대상은 5070 장·노년층이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상반기 발생한 보이스피싱 범죄 1만2339건 중 47.6%가 50~60대였다. 다른 연령층과 비교해 자산이 많은 반면, 최신 금융 사기에 대한 정보는 부족한 탓에 보이스피싱 조직들의 주요 표적이 돼왔다.

최근엔 50대 피해자는 대폭 감소하고 있다. 50대들이 과거에 비해 인터넷 기술 등에 더 친숙해졌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대신 60대와 20대 이하 피해 비율이 급증하는 양상이다. 올 상반기 20대 이하 보이스피싱 피해자 비율은 23.9%로 가장 많은 피해 연령대인 60대(25.6%)의 바로 뒤를 이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소셜미디어와 커뮤니티 등 디지털 활동이 활발한 청년층이 새로운 범죄 타깃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했다.

정작 보이스피싱 발생 건수는 2020~2021년 연간 3만여 건에서 2022년부터는 연간 2만여 건으로 줄었다. 경찰에서는 이러한 경향을 보이스피싱 범죄 ‘전문화’ 결과로 보고 있다. 유출된 개인 정보를 활용한 사회 공학적인 수법이 점차 발달하고 첨단 IT 기술을 활용하는 수법도 늘면서 1인당 피해액이 늘어난 것이다. 박성주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보이스피싱으로 의심될 경우 경찰이 곧바로 금융기관에 연락해 송금을 미리 차단하고 사후에 해제할 수 있도록 법 제정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보이스피싱

‘목소리(voice)’와 ‘낚아챔(phishing)’을 합친 단어로, 전화 등으로 수사·금융기관 관계자를 사칭해 개인 정보를 빼내거나 돈을 낚아채는 사기 수법. 최근 인공지능으로 영상이나 목소리를 위·변조하는 딥페이크·딥보이스 기술 등 수법이 갈수록 고도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