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만 빌려달라"던 그들…어느새 나도 공범이 됐다[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기]
2024년 5월 초, 자금이 급하게 필요했던 B씨는 인터넷에서 대출 광고를 보고 문의를 남겼다. 곧 전화가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C저축은행 D 팀장입니다. 대출 상담 신청해주셔서 연락드렸어요.”
상대방은 친절하고 전문적이었다.
“고객님께는 3200만원까지 대출이 가능합니다. 이자율은 6.2%로 아주 좋은 조건이에요.”
B씨의 마음이 설렜다. 다른 곳보다 조건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기존에 E저축은행에서 받으신 대출을 먼저 정리해주셔야 합니다.”
두 번째 전화, 갑작스러운 ‘계약 위반’ 통보
B씨가 대출을 진행하겠다고 하자, 잠시 후 다른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고객님, E저축은행 F 팀장입니다.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목소리가 다급했다.
“고객님이 받으신 대출은 대환대출이 되지 않는 상품인데, 다른 곳에서 대출을 받으신 것으로 확인됩니다. 이는 명백한 계약 위반입니다.”
B씨는 당황했다. 계약 위반이라니, 처음 듣는 얘기였다.
“지금 C저축은행에서 대출을 해주려고 해도, 저희가 지급정지를 걸어둔 상태라 대출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먼저 기존 원금 1350만원을 상환하셔야만 새 대출을 받을 수 있어요.”
대출 제안에 넘어간 A씨, 계좌 제공하며 공범 역할
이 사기극에는 복잡한 상황에 놓인 또 다른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자신의 계좌를 제공한 A씨였다. A씨는 처음에는 피해자였지만 결국 가해자가 된 케이스였다.
A씨 역시 2024년 5월 14일경 대출을 알아보던 중 보이스피싱 조직원으로부터 “서민 긴급대출을 해드리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은 A씨에게 대출을 해주는 대신 다른 요구를 했다. “대출 심사를 위해 계좌를 잠깐 빌려달라”거나 “절차상 필요한 일”이라며 A씨의 협력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A씨는 결국 이들의 사기 범행에 순차 가담하며 그 범행을 용이하게 하기로 결심했다. A씨는 자신의 계좌가 보이스피싱 범행에 사용될 것을 알면서도 협력하게 됐다.
정교한 사기극의 완성
2024년 5월 17일 오후 1시 57분, B씨는 결국 A씨 명의의 G은행 계좌로 1350만원을 송금했다.
그로부터 불과 8분 후인 오후 2시 5분, A씨는 서울 영등포구 G은행 지점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A씨는 먼저 입금된 돈 중 일부를 미화 3000달러로 환전했다. 약 407만원 상당이었다. 동시에 600만원을 현금으로 출금했다. 이 모든 과정이 오후 3시 1분까지 약 한 시간에 걸쳐 이뤄졌다.
환전과 출금을 마친 A씨는 곧바로 영등포구 I빌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성명불상의 조직원에게 달러와 현금을 전달했다.
A씨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후 4시 4분, A씨는 다시 여의도의 한 상점에서 330만원 상당의 상품권을 구매했다. 그리고 인근 편의점에서 또 다른 조직원에게 상품권을 건넸다.
A씨는 이날 하루 동안 보이스피싱 조직의 완벽한 ‘현금 수거책’ 역할을 수행했다.
법정에서 밝혀진 진실
결국 이 사건은 수사기관에 적발됐고 재판에 넘겨졌다. A씨는 이 사건 초기에는 대출을 빌미로 한 보이스피싱의 피해자였지만, 결과적으로는 범죄에 가담한 가해자가 되고 말았다.
의정부지법 형사13부(재판장 오윤경)는 지난 6월 A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범행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스피싱 범행의 완성에 필수적인 현금 수거 및 전달책 역할을 수행했다”며 “사회적 해악이 큰 범죄에 가담한 죄책이 가볍지 않다”고 판시했다.
재판 과정에서 B씨는 A씨와 합의해 A씨에 대한 처벌불원 의사를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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