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시대 이해하는 3개의 질서, 그리고 한국 [ER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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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상호 관세’가 7일(현지시간)을 기점으로 사실상 전 세계에 동시 발효됐다. 단순한 관세율 인상을 넘어 글로벌 공급망의 재편을 뛰어넘는 뉴노멀의 질서가 정립되는 순간이다. 지난 80년간 세계 경제의 근간이었던 자유무역과 다자주의 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또다른 불확실성의 안대가.
미국은 이제 관세 장벽을 넘어 자국 중심의 ’관리무역 블록’을 쌓아 올리고 있으며 세계는 미국의 의도에 따라 세 개의 다른 질서로 재편되는 ’대전환(The Great Reordering)’의 시대로 본격 진입했다. 예측 가능했던 규칙의 시대는 가고 힘과 거래에 기반한 지정학적 경제의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우선주의 2.0’의 청사진 IEEPA와 3중 압박
이번 관세 정책의 심장부에는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이 있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는 ’거대하고 지속적인 무역적자’ 자체가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비상사태’라고 선언하며 본래 적성국 제재에 동원되던 이 법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 들었다.
세계무역기구(WTO)의 복잡한 절차와 규범을 일거에 무력화하고, 대통령의 행정명령만으로 전 세계 교역 파트너를 옭아맬 수 있는 강력한 무기다.
미국이 설계한 관세 체제는 세 겹의 정교한 그물망이다.
먼저 모든 국가에 10%의 ’기저 관세’를 부과해 교역 비용의 기본값을 높였다. 여기에 무역수지 불균형 등을 명분으로 57개국에 15%에서 40%가 넘는 ’국가별 차등 관세’를 예고하며 각국을 협상 테이블로 내몰았으며 그 직후 철강·자동차·구리 등 핵심 산업에는 ’무역확장법 232조’를 근거로 최대 50%의 ’징벌적 관세’를 별도로 부과했다.
이 다층적 압박은 법원에서도 논란의 대상이다. 그러나 항소법원이 정부의 손을 들어주면서 법적 분쟁 속에서도 관세는 결국 발효됐다. 단순한 세금 징수가 아니다. 미국의 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 강력한 ’강제 외교(coercive diplomacy)’의 틀로 기능하며 세계를 미국의 의도대로 재편하는 상징의 미장셴이다.
반 트럼프 시위. 사진=연합뉴스
세 갈래로 찢긴 세계 "블록, 동맹, 그리고 경쟁자"
미국의 관세 압박은 전 세계 국가들을 세 등급의 다른 운명으로 내몰았다. 이제 무역 조건은 경제 논리가 아닌 미국과의 지정학적 관계에 따라 결정되며, 그 판단의 잣대는 미국이 쥔다는 설명이다.
먼저 1등급 ’관리무역 블록’이다. USMCA라는 요새가 세워졌다. 미국의 최인접 파트너인 캐나다와 멕시코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25~35%의 높은 상호 관세율을 통보받았다. 일각에서 미국이 인접국에 무자비한 칼날을 휘두르고 있다는 주장이 나오는 배경이다. 그러나 사실일까. ’미국·멕시코·캐나다 협정(USMCA)’이라는 강력한 별도의 요새가 세워진 것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실제로 트럼프 행정부는 USMCA의 엄격한 원산지 규정을 충족하는 상품(양국 교역의 85% 이상)에는 관세를 면제하며 나름의 전략적 판 흔들기에 나섰다.
사실상 북미 대륙을 외부와 차단된 하나의 거대한 ’관리무역 블록’으로 만드는 조치다. 물론 50%의 철강 관세나 25%의 자동차 관세는 여전히 일부 적용되고, 2026년으로 예정된 USMCA 재검토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으로 남아있으나 미국은 USMCA라는 요새를 통해 북미와 세계를 분리했다. 새로운 고립주의다.
여기에 2등급으로 볼 수 있는 ’거래 동맹’이 있다. 소위 관세 15% 클럽이다.
유럽연합(EU), 일본, 그리고 한국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막대한 자금을 뜯기면서도 ’15% 클럽’에 편입되어 최악의 시나리오를 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당초 25~30%의 고율 관세 위협 앞에서 미국의 요구에 응하는 길을 택했기 때문이다.
EU는 향후 3년간 7500억 달러 규모의 미국산 에너지 구매를 약속했고, 오랜 WTO 협정까지 깨며 일부 의약품 무관세 원칙을 포기했다. 일본은 대규모 대미 투자와 농산물·에너지 시장 개방을 대가로 치렀다. 한국 역시 반도체·의약품 분야의 불리한 조치를 피하는 약속을 확보하는 대가로 15% 관세를 수용했다. 이들의 생존법은 미국의 지정학적, 경제적 요구에 순응하고 값비싼 ’안보 비용’을 지불하는 일종의 교환동맹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3등급 ’징벌 대상’이다. 고립된 중국과 인도가 단적인 사례다.
미국의 최대 경쟁자인 중국은 무역 전쟁의 최전선에서 여전히 고립되어 있다. 한때 125%까지 치솟았던 관세율은 현재 30% 수준의 ’임시 휴전’ 상태지만, 이는 여전히 동맹국의 두 배에 달하는 징벌적 세율이다.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는 미국의 대중 실효 관세율이 54.9%에 달한다고 분석하며 양국 경제의 디커플링(탈동조화)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인도도 마찬가지다. 러시아와의 관계를 이유로 동맹국임에도 25%의 고율 관세를 부과받았다. 한때 튀르키예와 함께 제3지대 외교로 영악한 판단력을 보여 각광을 받았으나 이는 바이든 행정부때나 가능한 찬사였다. 무자비한 트럼프는 달랐기 때문이다. 무역이 어떻게 지정학적 목적을 달성하는 무기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사례다.
사진=연합뉴스
질서의 종말과 새로운 생존법
트럼프발 관세 정책은 단순히 물가를 올리고(미국 가구당 연 2400달러 부담) 성장을 둔화시키는 것을 넘어, 세계 경제의 운영체제를 바꾸고 있다.
과거 기업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추구했던 ’적시생산(Just-in-Time)’ 기반의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생존을 위협하는 리스크가 됐다. 대신 예측 불가능한 위기에 대비하는 ’만일의 경우(Just-in-Case)’를 위한 ’회복탄력성(Resilience)’이 새로운 표준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기업들은 생산기지를 자국(리쇼어링), 인접국(니어쇼어링), 혹은 ’관리무역 블록’ 안의 동맹국(프렌드쇼어링)으로 이전하며 공급망을 재편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의 ’분절(Fragmentation)’이 심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한국은 어디로 가야 할까? 교역 포트폴리오 재설계를 통해 미·중 의존도를 낮추고 아세안, EU 등 다른 거대 경제권과의 관계를 심화해 충격 흡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나아가 통상·외교·안보의 통합적 접근이 절실하다. 무역이 더 이상 순수한 경제 문제가 아님을 직시하고, ’15% 클럽’ 내에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다층적 대미 관계 관리가 필수적이다. 마지막으로 공급망 지도를 다시 그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국내 기업들은 ’회복탄력성’을 중심으로 공급망 전체를 분석하고, 특정 블록에 종속될 리스크를 분산하는 전략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규칙이 사라진 세계에서 과거의 성공 방정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힘의 논리와 거래가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의 파고를 넘기 위한 국가적 차원의 총력적인 대응과 전략적 상상력이 절실한 시점이다.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면, 공포에만 질리지 말고 움직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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