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초거대기업이 숨긴 추악한 ‘도살장’ 드러나…캄보디아 범죄왕국 해부
미국과 영국 정부가 캄보디아 내 한국인 납치·인신매매·고문 등을 주도한 프린스 그룹을 초국가적 범죄조직(TCO)으로 지정하고 역대 최대 규모의 제재를 단행한 배경에는 홍콩, 싱가포르, 대만, 라오스, 팔라우, 카리브해 조세회피처 등지의 118개에 달하는 법인과 연관된 프린스 그룹의 초국가적 범죄 네트워크(TCO)가 놓여 있다.
앞서 미 재무부 해외자산통제국(OFAC)은 지난 14일 프린스 그룹을 ‘돼지 도살(Pig Butchering)’로 알려진 신종 투자 사기와 인신매매, 강제노동 등 반인륜적 범죄를 자행한 네트워크로 규정하고 영국 정부와 공조해 약 21조원 어치에 달하는 비트코인을 압수하는 등 사상 최대 규모 제재 조치를 부과했다.
프린스 그룹 회장인 1987년생 중국 푸젠성 출신 캄보디아 이민자 천즈(Chen Zhi) 회장을 비롯한 핵심 인물 등 10명과 프린스은행 등 118개 계열사들이 모두 이번 제재 대상에 올랐다. 캄보디아 정재계를 주무르던 거대 기업이 사실은 인신매매와 사기를 기반으로 한 ‘범죄 왕국’이었다는 충격적인 실체가 드러난 것이다.
이번 제재의 정점에는 천즈 프린스 그룹 회장이 있다. OFAC가 공개한 관계도에 따르면 천 즈는 ‘리더’이자 ‘회장’으로서 프린스 홀딩 그룹(Prince Holding Group)과 프린스 환위 부동산 그룹(Prince Huan Yu Real Estate)을 직접 통제한다. 또한 캄보디아의 주요 은행인 프린스 뱅크의 지분을 보유한 주주이기도 하다.
천즈 회장을 정점으로 한 핵심 수뇌부의 역할 분담은 조직적이고 치밀했다. 미 재무부가 공개한 관계도에 따르면, 저우 윈(Zhou Yun·Sandy Zhou)은 공식 역할은 ‘재무 보조 및 자산 관리자’로 천즈 회장의 금고지기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파악된다.
주 중뱌오(Zhu Zhongbiao·Jack Zhu)는 캄보디아 헝 신 부동산(Cambodia Heng Xin Real Estate) 회장 직함 뒤에 숨어 악명 높은 스캠 단지 진베이(Jin Bei)와 골든 포춘(Golden Fortune) 과학단지와 연계해 인신매매, 고문, 강제노동 등 을 자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텟 리(Thet Li) 는 ‘불법금융 최고재무책임자(CFO)’란 역할 이름 그대로 조직의 범죄 수익 세탁을 총괄한 인물로 지목된다. ‘건설 감독’인 레이 보(Lei Bo) 역시 스캠 단지 등 범죄 인프라 건설을 담당한 핵심 조력자로 추정된다.
이들은 합법적인 기업인의 탈을 썼지만 실제로는 천즈 회장의 지휘 아래 불법 온라인 도박·사이버 사기·자금 세탁 네트워크를 가동하는 ‘행동대장’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선진국을 겨냥한 프린스 그룹의 핵심 범죄 수법은 ‘돼지 도살’로 불리는 로맨스 스캠 결합형 투자 사기다. 피해자에게 연인처럼 접근해 신뢰를 쌓은 뒤 가짜 암호화폐 투자 플랫폼에 거액을 투자하도록 유도해 자금을 편취하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취업 사기 등으로 유인된 피해자들이 동원됐다. 천즈 회장과 연계된 범죄단지(웬치)에 감금된 이들은 고문과 강제노동에 시달리며 사기 범죄에 강제로 가담해야 했다.
이렇게 벌어들인 막대한 범죄 수익은 정교한 자금 세탁 과정을 거쳤다. 블록체인 분석 기업 TRM 랩스에 따르면 이들은 비트코인(BTC)이나 트론(Tron) 체인 기반 테더(USDT) 등 가상자산을 활용했다.
범죄 수익은 스캠 주소에서 개인 지갑(Unhosted Wallets)으로 옮겨진 뒤, 장외거래(OTC) 브로커와 고위험 거래소를 통해 현금화됐다. 이 자금은 최종적으로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 케이맨 제도, 홍콩, 싱가포르 등에 설립된 유령회사(셸컴퍼니)의 은행 계좌로 흘러 들어갔다.
실제로 OFAC이 제재 목록에 올린 118개 법인의 주소지는 캄보디아뿐 아니라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싱가포르, 홍콩, 대만, 케이맨제도 등 글로벌 각국에 퍼져있다. 이는 프린스 그룹이 얼마나 광범위한 초국경 자금 세탁 네트워크를 구축했는지 보여준다.
이번 제재가 캄보디아 경제에 미칠 가장 큰 충격파는 단연 프린스 은행의 몰락이다. 프린스 은행은 천즈 회장의 핵심 자금줄이자 합법을 가장한 범죄 수익 세탁의 ‘세탁기’ 역할을 한 것으로 지목됐다.
미국의 제재 목록에 오른 은행은 사실상 국제 금융 시스템에서 퇴출된다. 달러화 거래가 막히고 해외 은행과의 스위프트(SWIFT) 망 접근이 차단되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전국에 30여개 지점을 둔 주요 상업은행 중 하나가 순식간에 국제금융망에서 고립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미 현지에서는 지난 17일 프린스 은행 지점에서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 사태가 발생하는 등 캄보디아 금융 시장에 제재 조치가 미칠 후폭풍이 현실화되고 있다.
미 OFAC은 시장의 급격한 혼란을 막기 위해 오는 11월 13일까지 프린스 홀딩 그룹, 프린스 은행, 프린스 환위 부동산 등 3개 핵심 기업과 그 자회사들과의 거래를 정리할 수 있도록 하는 ‘일반 허가 1호’를 발령했다.
하지만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 유예 기간은 사실상의 사망 선고에 가깝다는 게 금융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캄보디아 금융 당국이 긴급 유동성 지원 등 대책 마련에 나섰지만 제재 대상 은행과의 거래를 끊으려는 국내외 기업과 예금자들의 이탈을 막기엔 역부족일 전망이다.
미 재무부는 “이번 조치는 가상자산을 이용한 사기 범죄와 인신매매라는 반인도적 범죄를 결합한 현대판 노예제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며 “합법적인 사업의 탈을 쓰고 국제 금융 시스템에 기생하는 범죄 네트워크를 끝까지 추적할 것”이라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