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훔쳐 무단 배포…무너지는 증권사 리서치센터
“모두가 리서치 보고서를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도 공짜여야 한다는 모순적 태도를 보이죠.”(독립 리서치회사 대표)
자본시장 핵심 인프라인 증권사 리서치센터가 흔들리고 있다. 기업 분석 서비스 원천인 애널리스트가 줄고, 중소기업 보고서는 10여 년 사이 반토막 났다.
증권사들은 주요 배경으로 보고서 시장의 ‘무임승차’ 확산을 꼽는다. 허가받지 않은 수집·판매업자가 생산자의 이득을 가로채는 지금 같은 구조에선 투자를 지속하기 어렵다는 토로다. 금융당국 차원에서 저작권 보호 강화에 적극 나서지 않는다면 자본시장 인프라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위협받는 투자 정보 인프라국내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심각한 인력 부족에 시달린다. 분석 대상 종목이 꾸준히 늘고 있는데도 장기간 애널리스트를 확충하지 못해서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국내 61개 증권사가 고용한 애널리스트(금융투자분석사)는 현재 1082명이다. 2010년 말 1575명에서 3분의 1이 사라진 뒤 수년째 제자리걸음이다. 애널리스트 1인당 업무 부담은 계속 불어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 조사를 보면, 1인당 연평균 리서치 보고서(조사분석자료) 발간 건수는 2013년 52건에서 2019년 이후 70건을 넘어섰다. 전체 증권사 발간량은 연간 7만여 건이다.
제한된 인력을 소수 인기 종목에 투입할 수밖에 없어 중소형주 보고서는 사라질 위기다. 작년에 나온 중소형주 보고서는 237건에 불과했다. 2010년 445건에서 47% 감소했다. 증권사 서비스 이용자가 1700곳 넘는 코스닥시장 상장사 대부분에 관해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리서치센터 입지는 기관투자가와 애널리스트의 정보 교류 관련 규제까지 겹쳐 더 좁아지는 추세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예전처럼 법인 영업을 뒷받침하지 못해 돈만 쓰는 부서라는 인식이 커지고 있다”며 “업무량 증가로 보고서 품질이 나빠지고, 이 때문에 리서치센터 입지가 더 좁아지는 악순환에 빠졌다”고 말했다.
리서치 강화 발목 잡는 ‘무단 배포’증권사가 리서치센터를 운영하는 것은 주요 정보를 거래 고객에게 우선 제공해 수수료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다. 리서치 인력 강화를 주저하는 주요 배경 중 하나는 이런 점에서 분명한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리서치 보고서는 텔레그램, 블로그 등 각종 SNS를 통해 단시간에 퍼진다. 새 고객을 끌어오거나 관련 거래 수수료를 늘리는 ‘고객 우선’ 서비스로서 기능을 거의 상실했다.
다수 증권사는 아예 전략을 틀었다. 보고서를 증권정보포털 등에 무료로 퍼뜨려 브랜드 노출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집중하는 식이다. 낚시성 제목이 붙은 보고서가 늘어난 배경이다. 한 애널리스트는 “어차피 해당 증권사와 거래 관계가 없어도 누구나 낮은 비용이나 무료로 종목 분석과 추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지 않냐”고 자조했다.
유료 보고서 판매 채널을 통한 수입도 미미하다. 국내 증권사는 에프앤가이드가 운영하는 ‘FN리서치’ ‘와이즈 리포트’ 서비스에 보고서를 공급한다. 증권사별로 받는 수익은 대부분 연간 3000만원에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1년에 3000개 보고서를 내는 증권사라면 건당 1만원도 받지 못하는 셈이다.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건당 100만원 이상으로 추산하는 보고서 생산 비용과 비교해 미미한 대가를 받아 상실감이 크다”고 털어놨다.
저작권 침해 예방 시도 ‘수포’로“앞으로 나올 리서치 보고서까지 무단 재판매를 막아 달라는 청구는 기각한다.” 증권사들은 최근 무단 유포업체와 벌인 저작권 침해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유포 행위 재개를 원천 차단하는 데는 실패했다.
한국투자증권은 2021년부터 한빛아이에이홀딩스와 이어온 소송에서 “한빛 측이 앞으로 나올 우리 리서치 보고서를 무단 배포하지 못하도록 해달라”고 청구했다. 한빛은 보고서를 무단으로 가져다 유료로 제공하는 회사다. 이에 1심과 2심 재판부는 “기존에 발간한 보고서의 무단 판매를 중단하라”며 한투증권 손을 들어주면서도 “앞으로 나올 보고서까지 무단 판매를 막을 순 없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리서치 보고서를 저작물로 보려면 최소한 창작적 표현 형식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로 고정적 형태를 갖춰야 하는데, 장래의 보고서는 그 형태를 갖췄다고 보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2023년 이 같은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다. 악의적인 무단 유통업체가 있더라도 근본적으로 판매를 막지 못하고, 저작권 침해 행위가 발생할 때마다 손해배상을 반복 청구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무단 이용 사례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지는 환경에서 반복 소송을 해봐야 ‘물컵으로 산불을 진화’하려는 격”이라며 아쉬워했다. 한투증권과 같은 소송에 나선 일부 증권사는 추가 소송을 포기했다. 한빛은 지금도 보고서를 판매하고 있다.
“공짜 인식 전환에 힘 모아야”리서치 보고서 무단 유포를 방치했다가는 결국 고품질 보고서의 ‘실종’을 낳을 것이란 우려가 크다.
증권사들은 바닥에 떨어진 보고서 가치를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자구책을 시도하고 있다. NH투자증권과 교보증권 등은 자사 증권 계좌를 보유한 고객만 분석 보고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접근 권한을 차등화했다. 홈페이지나 전문 유통업체에 보고서 표지와 요약만 올리는 사례도 많아졌다.
하지만 글로벌 투자은행(IB)처럼 무상·헐값 유포를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감시하지 않으면 리서치 보고서 경쟁력 악화를 근본적으로 막기 어렵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메릴린치는 최신 정보기술(IT)을 적용해 정기적으로 인터넷 유포 사례를 색출해 차단하고 있다. 합법적인 유통 채널에는 고유한 ‘워터마크’를 새긴 재판매 전용 보고서를 제공한다. 모건스탠리는 별도 조직을 두고 리서치 보고서 유출을 감시 중이다.
한 독립리서치 회사 관계자는 “모두가 리서치 보고서를 중요한 투자 정보라고 생각하면서도 비용을 들이지 않고 구할 수 있는 공공재로 여기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국과 금융투자협회 등 모두가 정당한 비용을 내는 문화 확산에 힘써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호/류은혁 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