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 무역협상 타결 - 최악 피했지만 차악 만났다②] 치열한 전쟁의 끝, 피로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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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2월 10일 워싱턴DC 백악관 집무실에서 관세 관련 행정명령에서 서명한 뒤 이를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로이터 연합뉴스
한미 무역협상이 전격 타결되며 약 566억 달러 규모에 달하는 한국 대미 수출 전반의 최악 시나리오는 피하게 됐다는 평가다.
이재명 대통령도 타결 직후 "수출 환경의 불확실성을 없애고 미국 관세를 주요 대미 수출 경쟁국보다 낮거나 같은 수준으로 맞춤으로써 주요국들과 동등하거나 우월한 조건으로 경쟁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고 자평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무거운 미국의 조건을 감내하며 소위 피로스(Pyrrhic victory)의 승리에 가깝다는 분석도 만만치않다.
트럼프의 ’최후통첩’… 4개월간의 피 말리는 대치
이번 협상은 지난 4월 2일 트럼프 대통령이 상호 관세 정책을 공식화하며 시작됐다. 모든 국가의 수입품에 10%의 기본 관세를 부과하고, 미국과의 무역에서 큰 적자를 내는 국가들에 대해서는 더 높은 ’상호관세’를 추가로 매긴다는 선언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5일 0시 1분(동부표준시)을 기해 모든 수입품에 대한 10%의 보편관세를 발효하는 한편 4월 9일 0시 1분부터는 주요 교역국을 대상으로 한 상호관세가 추가로 시행했다. 그는 관세 발표일(4월 2일)을 ’해방의 날(Liberation Day)’로 명명하며, 외국 상품 의존에서 벗어나 미국 경제를 보호하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피력했다. 정책 시행의 법적 근거로는 무역 적자를 국가 비상사태로 간주해 대통령에게 광범위한 권한을 부여하는 국제긴급경제권한법(IEEPA)을 활용했다. 8월 1일을 최종시한으로 잡으며 상대방을 압박했다.
한국을 콕 집어 높은 세율의 대상으로 지목하기도 했다. 그는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한국의 대미(對美) 관세율이 50%라고 적힌 차트를 들어 보이며 "각 나라가 미국에 부과하는 관세의 절반만큼 부과한다"고 했지만, 구체적인 산식은 공개하지 않아 논란이 컸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로 대부분 품목이 무관세로 교역되고, 지난해 기준 미국산 수입품에 대한 한국의 평균 관세율이 0.79%에 불과하다는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수치기 때문이다.
발표 직후 전문가들과 소셜미디어를 중심으로 트럼프 행정부가 제시한 ’관세율’의 실체에 대한 분석이 쏟아졌다. 핵심은 이 수치가 실제 관세나 비관세 장벽을 반영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미국의 대(對) 해당국 무역 적자를 총수입액으로 나눈 값이라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지난해 미국 인구조사국(USCB) 자료 기준, 미국의 대한국 무역 적자(약 655억 달러)를 대한국 수입액(1315억 달러)으로 나누면 약 49.8%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이 제시한 50%와 거의 일치하는 결과다. 미국 정부가 부랴부랴 관세 비율을 조정하는 촌극을 연출한 배경이다.
이런 가운데 정부는 구윤철 경제부총리를 필두로 한 고위급 비상 대응팀을 즉시 꾸려 워싱턴과의 힘겨운 협상에 돌입했다. 그러나 미국 협상팀은 2018년과 같은 단순한 ’쿼터-관세 면제’ 방식은 없다고 못 박으며 강대강 대치를 벌이기 시작했다. 대신 무역, 투자, 안보 등 모든 현안을 한 번에 다루는 ’패키지 딜’과 관세율 인하의 대가를 요구하는 ’바이 다운’ 개념을 들고나오며 판을 흔들었다.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지난 7월 23일 미국 워싱턴 DC 상무부 회의실에서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왼쪽부터),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부 장관과 면담을 가졌다. 사진=산업통상자원부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관세 협상이 타결되며 분위기가 묘해졌다. 실제로 미국은 최근 타결된 미일 협상 결과를 거론하며 한국을 강하게 압박했다.
일본은 5500억 달러라는 천문학적인 대미 투자 보따리를 푸는 대가로 보편 관세를 25%에서 15%로, 자동차 관세는 12.5%로 낮추는데 성공했다. 나아가 미국의 가장 큰 위협이었던 일본산 자동차에 대한 25%의 ’상호관세’ 부과가 절반 수준인 12.5%로 인하하는데 성공했다. 기존의 최혜국대우(MFN) 관세 2.5%를 더하면 일본산 자동차에 적용되는 실효 관세율은 15%가 된다. 이 관세 인하의 대가로 일본은 5500억 달러 규모의 대미 투자 약속과 함께 농산물을 포함한 자국 시장 개방 압력을 교환한 셈이다.
여기에 손 마사요시 회장이 주도하고 정부가 지원한 ’재팬 인베스트먼트 이니셔티브’는 일본이 미국의 경제 재건 파트너를 자임했다. 또 방위비 증액과 항공기 추가 구매, 알래스카 LNG 프로젝트 참여 등은 안보 협력의 강화를 약속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심지어 가장 민감한 쌀 시장까지 일부 개방하며 미국이 제기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요구에 화답했다.
일본과의 협상을 마무리 한 미국 정부는 한국을 대상으로 "일본과 같은 성의를 보여라"고 종용했다. 특히 협상 타결의 전제 조건으로 미국산 쇠고기, 쌀, 사과 등 민감한 농산물 시장의 추가 개방을 강력히 요구해 눈길을 끌었다. 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지지층에 내세울 ’전리품’으로, 협상 내내 한국 대표단을 가장 힘들게 한 요인으로 지목됐다.
결국 미국의 막대한 투자 요구와 수용 불가능한 수준의 농산물 시장 개방 요구에 협상은 7월 내내 교착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나아가 미국은 예정됐던 ’2+2 통상협의’를 일방적으로 취소하며 압박 수위를 최고조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2+2 통상 협의에는 한국 측에서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측에서는 베센트 재무장관과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가 참석할 예정이었으나 미국의 심리전에 흐름은 급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돈을 내고 관세를 낮추라"는 글을 트루스소셜에 올리며 직접 여론전에 나서기도 했다. 미국의 요구 사항이 국내에 알려지자 농민 단체들은 연일 주한미국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열었고 정치권에서도 비판이 쏟아지며 협상단은 안팎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였다.
그러는 사이 8월 1일 데드라인은 다가왔고,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하워드 러트닉 상무장관의 자택까지 찾아가는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정부 측은 이 자리에서 대미 투자 확대와 함께 국내에서도 가장 민감한 현안인 소고기·쌀 등 농축산물 시장 추가 개방 카드를 제시하며 배수진을 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핵심 요구사항을 일부 수용하며 협상 타결의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측은 "더 많은 양보"를 요구하며 압박의 수위를 늦추지 않은 것으로 전해져, 양측의 입장차가 여전히 큼을 확인했다.
어려운 협상이었으나 데드라인을 넘기지 않으려는 양측의 의지도 확고했다. 백악관이 이례적으로 "우리는 불공정한 무역 장벽을 낮추기 위해 한국과 계속해서 생산적인 협상을 하고 있다"는 공식평가를 남길 정도였다. ’생산적(productive)’이라는 표현은 외교적 수사지만 최소한 협상의 판이 깨지지 않았으며 대화의 모멘텀이 살아있음을 시사하는 긍정적 신호다.
이재용 삼성전자 (KS:005930) 회장이 7월 29일 서울 강서구 서울김포비즈니스항공센터(SGBAC)를 통해 워싱턴으로 출국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재계도 총출동했다.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자 정부뿐만 아니라 재계 총수들까지 직접 나섰기 때문이다. 7월 30일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관세 협상 지원을 위해 미국 워싱턴으로 출국했다. 앞서 지난 7월 28일과 29일에는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잇따라 미국으로 향하며 측면지원에 나서기도 했다.
김동관 부회장은 미국의 조선업을 지원하는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고 이재용 회장은 미국 내 반도체 투자 확대 및 AI 반도체 기술 협력을, 정의선 회장은 210억 달러 규모의 미국 내 자동차 생산 확대 및 신규 철강 공장 건설 투자 계획 등을 내세워 미국 측을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과의 최종 협상을 위해 만나고 김정관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이 미국 측 통상 수장들과 추가 협상을 벌이는 긴박한 상황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양국 대표단은 최종 조율에 극적으로 성공했다.
피로스의 승리인가
이번 협상 타결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일 수밖에 없다.
한국은 우선 25%라는 재앙적인 관세율을 피함으로써 주력 수출 산업의 궤멸을 막고 15%라는 고통스럽지만 예측 가능한 환경을 확보하는데 성공했으나 이는 단기적인 위기관리 측면에서의 성공이다. 그 대가로 지불한 3500억 달러의 대규모 자본 유출과 정치적으로 막대한 부담을 안기는 시장 개방을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는 전략적 손실에 가깝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성공적인 ’손상 통제(damage control)’였지만, 한국의 경제 주권을 상당 부분 내어준 ’피로스의 승리’로 기록될 것이다.
당장 자동차 산업은 큰 타격을 받을 전망이다. 15%의 관세는 여전히 막대한 비용 부담이기 때문이다. IBK경제연구소는 25% 관세 부과 시 대미 자동차 수출이 18.59% 감소할 것으로 분석한 바 있다. 그리고 15% 관세 역시 이에 준하는 상당한 수출 감소와 수익성 악화를 초래할 전망이다. 정부가 발표한 3조 원 규모의 긴급 유동성 지원, 전기차 보조금 확대 등 긴급 대책 이 단기적인 충격을 완화할 수는 있겠으나, 근본적인 경쟁력 약화를 막기에는 한계가 있다.
반도체 및 배터리 산업도 마찬가지다. 이들 첨단 산업 역시 15% 관세로 인한 직접적인 수익성 악화에 직면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은 시나리오에 따라 반도체 수출이 4.7%에서 8.3%까지 감소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3500억 달러 투자 약속으로 인해 미국 내 생산시설 건설이 가속화된다는 점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국내의 연구개발(R&D) 및 제조업 기반을 약화시키는 ’산업 공동화’ 현상을 유발하고,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같은 미국의 정책에 대한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농산물 시장 추가 개방 약속은 장기적으로 한국의 식량 주권을 잠식하는 결과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비록 이번 협상에서는 한숨 돌렸다지만 여전히 변수가 많다. 험로의 연속인 셈이다.
한미 무역협상 일지
▲ 1월20일 =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 2월10일 = 트럼프 대통령, 철강·알루미늄 수입품에 25% 관세 부과 예고.
▲ 2월13일 = 트럼프 대통령, 4월2일부터 상호관세 부과 예고.
▲ 2월27일 =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방미,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부 장관 등 면담. 관세조치 면제 요청.
▲ 3월12일 = 미국, 전 세계 철강·알루미늄 수입품에 25% 관세 발효.
▲ 3월21일 = 안덕근 장관 방미. 러트닉 장관 등 면담. 관세 등 현안 논의.
▲ 3월26일 = 트럼프 대통령, 외국산 자동차 및 자동차부품에 4월3일부터 25% 관세 부과 발표.
▲ 3월30일 = 트럼프 대통령, 4월2일부터 무역 불균형이 가장 큰 12개 국가뿐만 아니라 ’모든 국가’에 상호관세 부과 방침 천명.
▲ 4월8일 = 정인교 통상교섭본부장, 제이미슨 그리어 USTR 대표 면담.
▲ 4월24일 = 최상목 부총리·안덕근 장관, 스콧 베선트 미 재무부 장관·그리어 USTR 대표와 ’2+2 통상 협의’
▲ 5월16일 = 안덕근 장관, 그리어 대표와 제주서 통상장관 협의.
▲ 6월24일 = 여한구 통상교섭본부장 방미. 러트닉 장관·그리어 대표 등 면담. 상호관세·품목관세 면제 요구.
▲ 7월8일 = 여한구 본부장 방미. 러트닉 장관·그리어 대표 등 면담. 산업 협력방안 및 관세 등 현안 논의.
▲ 7월8일 = 트럼프 대통령 한국에 서한. 8월1일부터 상호관세 25% 부과 예정 적시.
▲ 7월23일 = 여한구 본부장 방미. 그리어 대표 등 면담.
▲ 7월24일 = 김정관 산업부 장관 방미. 여한구 본부장과 러트닉 장관 만나 관세 협상.
▲ 7월25일 = 김정관 장관·여한구 본부장, 러트닉 장관과 뉴욕서 협상.
▲ 7월27일 = 김정관 장관·여한구 본부장, 스코틀랜드 찾아가 러트닉 장관과 관세 협상.
▲ 7월29일 = 구윤철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김 장관·여 본부장, 러트닉 장관과 협상.
▲ 7월30일 = 구윤철 부총리 등 한국 협상단, 러트닉 장관·그리어 대표와 추가 협상.
▲ 7월30일 = 구윤철 부총리 등 한국 협상단, 백악관서 트럼프 대통령 면담. 관세협상 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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