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 개설 쉽고 추적 어려워… 가상화폐로 '이중 세탁'
가상 화폐 투자를 즐기는 A(35)씨는 지난 4월 인터넷 사이트에서 ‘가상 화폐 개설 돕는 고액 아르바이트’ 글을 보고 연락했다가 보이스피싱 ‘자금 세탁원’으로 수사를 받게 됐다. 한 안내원이 그에게 “코인 거래에 익숙하지 않은 남성의 계좌 개설을 도와달라”며 “우리가 시험 명목으로 보내주는 코인(가상 화폐)을 그 남성 계좌로 송금해 주면 된다”고 했다. 그러나 보이스피싱 조직이 수익을 가상 화폐로 세탁하기 위해 그를 이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보이스피싱 범죄 조직들이 가상 화폐를 자금 세탁의 새로운 수단으로 삼기 시작했다. 시중은행보다 가상 자산 거래소 계좌 개설이 훨씬 쉬운 데다가, 이체 한도도 없기 때문이다. 해외 가상 자산 거래소로 이체되면 수사기관의 추적도 어려워 대포 통장 이체와 함께 ‘이중 세탁’을 하고 있다. 경찰청에 따르면 올해 1~7월 보이스피싱 조직이 가상 자산 형태로 피해 금액을 빼돌린 사건이 420건으로, 작년 한 해(총 130건)의 3배를 넘어섰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가상 화폐 ATM(현금 자동 인출기)이 많아질수록 보이스피싱 자금 세탁 규모는 더욱 커질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다. 가상 화폐 ATM이 대규모로 보급된 미국에서 이미 이를 이용한 사기 피해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미 연방거래위원회(FTC) 발표에 따르면 2023년 미국 가상 화폐 ATM 사기 피해 액수는 1억1400만달러(약 1600억원)로 2020년보다 10배 이상 증가했다. 미국의 보이스피싱 사기범들은 정부 기관이나 기술 지원 직원을 사칭해 “계좌가 해킹됐다” “벌금을 내야 한다”고 속인 뒤, ATM 기계로 가상 자산을 송금하도록 유도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내에는 지난해 7월 서울 명동을 시작으로 현재 전국에 총 7대의 가상 화폐 ATM이 설치돼 있다. 비트코인·이더리움·테더 등 가상 화폐 3종을 원화로 환전해 주는데 아직은 외국인 전용이다. 하지만 국내 보급이 본격화되면 보이스피싱 범죄에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인공지능(AI) 기반 모니터링으로 고액·반복 거래를 감시하고, 거래소 실명 확인 강화, 이상 거래 탐지 시 거래 제한을 할 수 있도록 기술 보완이 필요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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