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 파고든 ‘코인사기’ 탄원서 126장 분석
②(中)‘믿음’ ‘고통’ ‘죄’ ‘거짓말’ 반복
사기 여러 번 당한 노인…모집대상 1호
새마을운동 경험 공동체문화 사기 족쇄되기도
“법은 옳다”…사법부 응보 기대도 반영
서울 서초구 법원로1길 6. 정곡빌딩 앞에 위치한 4㎡ 남짓의 ‘아도인터내셔널 코인사기 피해’ 농성천막에서 초로의 노인을 만났다. 아도인터내셔널 코인 사기로 총 1억3030만원을 몽땅 잃은 이모씨(75)다. 접이식 캐리어와 침낭, 핫팩과 손난로가 놓여있는 책상 앞에 쪼그려 앉은 그가 이불을 덮고 탄원서를 쓰고 있었다. 이씨는 “손이 떨리고 굼떠서 몇 장을 써도 버려서 다시 써야 한다”며 “어떤 분은 탄원서를 하도 써서 명필(名筆)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했다.
일정표도 보여줬다. 1인 시위 및 재판 방청, ‘천봉(천막봉사)’ 당직표다. 아도인터내셔널 코인 사기는 고소장을 낸 320명 중 50대 이상이 80.93%로 고령자가 대다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 정문, 서울중앙지검 서문·정문, 서울중앙지법 동문·정문 다섯 곳에서 매일 릴레이 피켓 시위를 한다. 오전 7시30분~9시, 오후 5시~6시30분 2개 조다. 매일 밤 10시, 무단점유를 단속하는 구청 직원들이 불시 방문하는 것에 대비해 천막에서 철야 대기조도 따로 있다. 탄원서도 쓰고 현수막도 건다. 이씨는 지난 1년2개월간 아도인터내셔널 피해자들이 주축이 된 한국사기예방국민회가 이런 방식으로 꾸준히 목소리를 내왔기 때문에 사기 주범이 법정최고형인 15년을 받을 수 있었다고 했다.
무엇이 고령의 사기피해자들을 이토록 분노하게 하고, 직접 행동하게 하는 것일까. 아시아경제가 126장의 아도인터내셔널 코인 사기 탄원서를 모아 ‘형태소(의미가 있는 언어의 최소 단위) 분석’을 진행했다. 노인심리전문가인 이호선 숭실사이버대학교 교수가 자문에 참여했다. 고령의 피해자들이 쓴 탄원서에 반복해 쓰인 어휘의 빈도를 살펴 사회적 함의를 파악하기 위한 시도다.
분석 결과 탄원서 126건 속에 숨겨진 언어의 퍼즐은 ‘믿음’ ‘고통’ ‘죄’ ‘거짓말’ 등의 키워드로 귀결됐다. ‘사기(261)’ ‘피해자(164회)’ ‘돈(142회)’이란 명사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쓰인 단어는 ‘없다(108회)’였다. 탄원서에서 ‘없다’라는 단어는 희망이나 자원이 없고, 사기 가해자들의 반성이 없고 죗값을 치르지 않는다는 것을 표현할 때 쓰였다. ‘죄가 없다’ ‘형벌을 내릴 수 없다’ ‘돈이 없다’ ‘방법이 없다’ ‘아무도 없다’ ‘반성이 없다’는 등으로 절망의 순간을 기록했다. ‘삶(37회)’ ‘고통(37회)’ ‘대출(25회)’ ‘눈물(19회)’과 같이 사기당한 후 파괴된 삶의 멍에가 묻어나는 단어들도 있었다. 1961년생 김모씨의 탄원서에서도 이런 대목은 잘 녹아 있다. “육십 평생 몸으로 열심히 일만하고 살았는데 요즘은 옛날 같지 않게 너무 오래 사는 세상이다 보니 노후에 살길을 찾는다는 것이 사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교수는 형태소 분석 결과에 대해 고령자들의 불안정한 심리 상태와 우울감을 엿볼 수 있다고 진단했다. 또 사기로 인한 경제적 파산이 1차적 피해라면 자산 손실을 자각하고 서서히 마주하게 되는 심리적 우울감은 노년의 삶을 위기로 몰아넣는다고 봤다. 그는 “어르신들은 사기 피해로 심리적 실패감과 물질적 파산을 동시에 경험한다”면서 “노후 파산에 직면해도 가족 혹은 자식에게 투자 과정이나 결과를 공유하지 않고 혼자 짊어지고 가려는 성향을 주로 보이고 결국 이 끝엔 죽음이 크게 자리 잡는다. 그래야 나의 실패가 가족과 지인에게 전이되지 않을 것이란 판단 때문”이라고 했다.
‘믿다(23회)’ ‘다단계(16회)’ ‘지인(14회)’ ‘거짓말(13회)’ ‘당하다(9회)’ 등의 단어 역시 자주 등장했는데 이는 다단계 사기 특성상 지인으부터 권유받아 투자한 노인들이 상당해서다. 믿다의 주어는 “판사님” “법”으로 연결되기도 했지만 “사기꾼” “회사”와 이어지기도 했다. 피해자들을 도와 고소를 진행한 최희선씨(가명)는 “가정 형편, 빚, 생활고 등 피해자들의 아픈 부분을 건드려 투자를 유도했다”고 밝혔다. 주연씨(가명)도 믿었던 친구를 통해 아도인터내셔널에 처음 발을 들였다. 뇌경색으로 바깥일이 어려운 남편 대신 가장 노릇을 해야 했던 그는 지난해 6월 대출받은 돈 970만원을 아도인터내셔널에 투자했다. 한 달 만에 사기란 사실을 알았다. “사기당한 사실을 알고 분해서 잠도 못 잤다"는 그는 세탁대행업체가 찜질방 등에서 수거한 수건을 개며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탄원서의 행간에선 사법부의 ‘응보’와 ‘법치’를 믿는 신뢰와 희망도 읽을 수 있었다. 반복해서 쓰인 ‘존경(42회)’ ‘재판(39회)’ ‘처벌(88회)’ ‘감사(20회)’ 등의 명사가 이를 뒷받침했다. ‘돈(142회)’과 ‘빚(36회)’은 투자의 이유가 되기도 하고 결과가 되기도 한다. 사기 탓에 금전적 손실을 입은 뒤 이를 만회하려다가 또다시 뒤통수를 맞는 피해자들이 많았다.
모집책을 하다 내부고발자가 된 피의자 신분의 20대 김정훈씨(가명)는 영업 대상 1호가 ‘사기당한 고령자’라고 했다. 김씨는 “원금 복구와 손실 만회에 대한 열망이 강하다 보니 이번 투자로 상쇄가 된다는 꾐에 더 쉽게 넘어온다”면서 “희망의 실마리라도 잡아보려는 분들의 심리를 악용하는 셈”이라고 했다. 여러 차례 사기를 당한 피해자들도 많았다. 경기도 이천에 거주하는 70대 김영화씨(가명)는 아도인터내셔널에 2700만원을 투자해 모조리 날렸다. 그 와중에 모집책 허모씨가 또 다른 코인 투자를 권유했다. 700만원을 추가로 집어넣었다. 물론 이마저도 모두 잃었다.
고령자들이 누군가를 믿고, 지속적으로 투자를 감행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내부고발자 김씨는 공동체 문화를 공유한 경험을 꼽았다. 노년층은 젊은 세대와 달리 새마을운동 등을 학습하고 경험한 세대다. 농업에 종사했던 어르신은 특히 그렇다. 이웃 단위의 커뮤니티를 통해 결속을 다진 기억도 있다. 김씨는 “어르신들일수록 ‘저 한 번 믿어보세요’란 영업 멘트가 의외로 잘 먹힌다”면서 “젊은층보다 노년층이 타인을 더 쉽게 믿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실제 형태소 분석 결과 공동체를 의미하는 ‘나라’ ‘미래’가 20회 반복됐고 ‘부탁(19회)’ ‘만나다’ ‘대한민국(13회)’과 같은 단어도 자주 나왔다.
저소득층일수록 충분하지 못한 노후자금은 잘못된 선택을 하게 만든다. 탄원서에 26회 등장한 ‘노후’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이유를 말해준다. 오영환 시니어금융교육협의회 사무총장은 “100세 시대를 살아야 하는 노년층은 현재 가진 노후자금으론 노후를 지탱하기 어렵다는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어 사기에 노출되기 쉽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나이가 들수록 신체에 대한 전반적인 퇴화가 일어나고 판단력이 흐려지게 된다”며 “이런 상황에서 사기 다단계 영업 행위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외부 성공 사례가 나한테도 일어날 수 있다고 믿게 되며 결국 노후자금 등을 투자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