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수익률 오르자 "위험자산 초과" 경고…규제에 묶인 퇴직연금
국내 퇴직연금 시장의 고질병은 낮은 수익률이다. 연금은 안전하게 굴려야 한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원리금 보장형에 자금 대부분이 묶여 있다. 조금의 위험도 허용하지 않으니 투자 수익률은 예금이자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익률이 낮으니 노후 자금을 충분히 불릴 수 없다.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운데 노인 빈곤율 1위를 16년째 지키고 있다. 노후 안전망이 돼야 할 퇴직연금 시장의 민낯이다.
연금 전문가들은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개선, 위험자산 운용규제 폐지, 네거티브 방식의 투자상품 규제 도입을 통해 퇴직연금 수익률을 구조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고 조언한다.
◇취지와 반대로 가는 ‘디폴트옵션’디폴트옵션은 연금 가입자가 별도 운용 지시를 하지 않으면 사업자가 알아서 사전에 지정한 포트폴리오로 운용하는 제도다. 한국에서는 2023년 하반기부터 시행됐다. 연금에 관심 없는 자금을 자동으로 실적 배당형에 투자하도록 이끌기 위해서다. 도입 3년째인 올해 1분기 말 기준 적립금은 44조8965억원까지 늘었다.
몸집은 빠르게 커졌지만 도입 취지를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게 연금 전문가들의 평가다. 1분기 말 기준 디폴트옵션 가입 금액의 87.7%는 원리금 보장형에 묶여 있다. 디폴트옵션에서 선택할 수 있는 포트폴리오 가운데 원리금 보장형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실적 배당형으로 자금을 유도하겠다는 도입 취지와는 반대 결과다. 서유석 금융투자협회장은 “한국과 일본을 제외하면 연금 선진국 가운데 디폴트옵션에 원리금 보장형을 포함한 국가는 없다”며 “디폴트옵션에서 원리금 보장형을 제외하거나 단기 자금 대기용으로만 활용하도록 제한하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디폴트옵션 가입 여부와 포트폴리오를 연금 가입자가 선택하도록 한 것도 제도 정착의 걸림돌로 꼽힌다. 연금 선진국은 투자자가 의사를 밝히지 않으면 자동으로 디폴트옵션에 가입된다. 포트폴리오를 선택하는 주체도 미국은 고용주인 회사가, 호주는 퇴직연금 사업자가 정하도록 돼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이 점이 바뀌지 않는다면 앞으로 디폴트옵션이 어떤 식으로 개선되더라도 도입 취지를 살리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투자 비중·상품 규제도 걷어내야퇴직연금에서 자산군별 투자 비중을 지켜야 하는 내용의 규제도 연금 수익률을 갉아먹는 요인으로 꼽힌다. 퇴직연금 제도는 투자자산을 두 가지로 나눈다. ‘안전자산’과 ‘위험자산’이다. 투자 상품에서 채권 비중이 절반 미만이면 안전자산, 그 이상이면 위험자산으로 분류한다.
연금 계좌에서 안전자산 비중은 최소 30% 이상을 유지해야 한다. 연금 선진국 가운데 자산별로 투자 비중 상하한을 규정하는 곳은 한국이 유일하다. 한 증권사 퇴직연금 담당 임원은 “주식형 펀드 수익률이 오른 것만으로도 위험자산이 70%를 넘으면 한도를 초과했다는 경고를 받아야 하는 게 웃지 못할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고용노동부가 관할하는 퇴직연금과 금융당국이 담당하는 개인연금의 규제가 다르다 보니 투자자 혼란도 크다. 같은 연금 상품이지만 퇴직연금과 달리 개인연금에서는 투자 비중 규제가 없다.
퇴직연금에서 투자할 수 있는 상품의 규제도 걷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국은 퇴직연금에서 투자할 수 있는 상품 유형을 법과 감독규정에서 하나하나 나열하고 있다. 명시된 상품만 연금에서 투자할 수 있는 구조다. 한 증권사 대표는 “연금에서 투자하기 부적합한 상품만 규정하고 나머지를 열어주는 식의 네거티브 규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나수지 기자
-
등록일 05:40
-
등록일 05:40
-
등록일 05: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