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술에 배부를 수 없는 밸류업…日처럼 꾸준히 추진해야"
“일본에서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 정책이 처음 등장한 것은 2013년입니다. 기업 참여가 저조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성과를 내는 데까지 10년이 걸렸습니다.”
김세완 자본시장연구원장은 23일 “정쟁으로 국내 밸류업 정책 활성화가 멈춰선 안 된다”며 이같이 강조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와 이화여대 경제학과에서 교수로 24년을 보낸 그는 지난 2일 자본연 신임 원장으로 취임했다. 자본연은 1997년 한국거래소와 금융투자협회 등이 출자해 탄생한 자본시장 전문 연구기관이다. 박사급 연구원을 이끄는 자리인 만큼 원장은 대체로 교수가 맡는다.
김 원장은 자산의 적정 가격 파악과 투자자 움직임을 해석하는 데 집중했다. 그가 상아탑을 벗어나 일선 연구원으로 나온 이유는 국내 자본시장의 체력이 한계에 달했다는 위기감에서다. 김 원장은 “금융 지식으로 무장한 젊은 서학개미들의 탈(脫)한국 속도가 가파르다”며 “‘트럼프2.0’ 시대 관세 인상으로 무역분쟁이 고조되면 국내 증시는 성장 기업에 자금줄을 대고 투자자 자산을 불리는 본연의 기능을 잃을 수도 있다”고 했다.
현재의 위기상은 저성장에 시달리던 일본 증시의 10년 전 모습과 비슷하다고 했다. 하지만 일본은 아베노믹스의 일환으로 시작된 밸류업 정책이 오랜 인내 끝에 비로소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는 “기업의 제 가치를 살리자는 밸류업은 특정 정부와 정당의 당리당략에 연연할 정책이 아니다”며 “밸류업 공시 확대를 목적으로 추진되던 법인세 감면, 배당 분리과세 등 세제 인센티브 법안이 최근 국회를 통화하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자사주 소각 규모가 작다는 일각의 비판에 대해서는 “작년까진 자사주 소각 공시가 아예 없다시피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기업의 자발적 참여가 증시 활성화를 이끌 것이라는 점을 줄곧 강조했다. 이사의 충실의무 조항에 주주를 추가하자는 상법 개정안과 관련해서도 “취지는 좋지만 재계가 우려하는 배임죄 등 발생 가능성을 어떻게 해소할지를 두고 시간이 걸릴 것”이라며 “당장은 주주 보호 의무 등 ‘핀셋 규제’를 담은 자본시장법 개정이 더 현실적”이라고 말했다.
투자 인구 고령화와 안전자산 치중 현상도 증시를 짓누르는 심각한 문제로 거론했다. 퇴직연금의 역할 강화가 시급하다고 했다. 김 원장은 “지난해 도입된 디폴트옵션(사전지정운용제도) 정책은 원리금 보장 상품 중심 운용에서 벗어나야 하며,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 자금도 집합운용(CDC)이 가능하도록 기금 형태를 허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도 포트폴리오 배분 의사결정 과정에서 일선 운용역의 역할을 늘려 수익률 제고를 꾀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김 원장은 “결국 미국 일본 독일 등 강대국들과 맞설 방법은 금융시장의 선진화뿐”이라며 “증시 체력 회복과 투자자의 시장 참여가 활성화되면 동아시아 금융 허브로서 한국에 국제 상품선물거래소 같은 기관이 들어서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시은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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