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걸 눈치 못채고, 사기 당해?"...피해자 '바보' 만드는 세상 [신종 금융사기 '넘버피싱'·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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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력을 갖춘 정보기술(IT) 업체인데다 회사 홈페이지에 게시된 전화번호니 믿었다.
그리고 1억원을 날렸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여전히 피해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기 피해를 당한 것도 힘들지만, 더 힘들게 한 건 따로 있었다. 전화번호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아 '넘버피싱' 피해를 입힌 업체의 태도였다.
A씨는 "그들의 일관된 입장은 '피해자가 멍청해서 생긴 일'이었다"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금융사기를 전문으로 하는 법조인도 A씨 사례처럼 '바보같이 당했다'는 세상의 시선이 수사 당국이나 법정에서 그대로 적용된다는 점에 주목했다.
법무법인 정앤김의 정성엽 변호사는 "'전화 한통으로 예금주 확인도 안 하고 거액을 보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냐'는 게 일반적인 시선"이라고 전했다.
취재가 시작되자 피해자가 나타났다
지난 3월 착신전환을 이용해 모수 서울의 예약금을 가로챈 사건을 취재한 뒤 '나도 피해자'라는 제보가 왔다. 모수 서울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형태의 범죄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알려주는가 하면 착신전환 범죄와 관련된 법원 판결문을 건넨 법조인도 있었다.
A씨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보'가 된 경위를 상세히 설명했다.
지난해 A씨는 IT 제조업체인 B회사가 주식 상장을 목표로 기업공개(IPO)에 나설 거라는 소식을 들었다. 투자하기 전 회사를 알아보기 위해 회사 홈페이지에 적힌 IPO 담당부서로 전화했다. 같은 번호로 수시로 전화한 그에게 어느 날 B회사 직원이 '누군가'와 통화 연결을 해 줬다.
이 사람은 대주주 지분의 일부를 매입하라고 권했다. 같은 전화번호로 여러 번 상담을 받아온 터라 상대의 말을 의심없이 받아 들였다. 알려준 계좌로 1억원을 입금했다.
입금 후 닷새가 지나도록 어떤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제야 '당했다' 싶었다. B회사도 A씨의 피해가 발생한 뒤에야 자신들의 전화번호가 범죄에 도용된 사실을 알게 됐다. 내부 조사에서 한국전력공사(한전) 직원이라는 사람이 공사를 이유로 착신전환을 유도한 게 확인됐다.
넘버피싱이 최근에 나타난 범죄 유형은 아니었다. 코로나19가 한참 확산되던 2020년에도 경기도 소재의 한 마스크 생산업체의 번호를 이용한 넘버피싱이 발생했다.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이 확인한 피해자 C씨는 2020년 2월 이 업체에 전화를 걸어 마스크 16만개를 주문했다. 담당자라는 사람은 구매대금 1억6000만원을 송금하라며 계좌번호를 불러줬다. 돈을 보내고 나니 평소 업체가 발행하던 영수증 속 계좌와 다른 게 보였다.
알고 지낸 업체 직원의 개인 휴대번호로 문의했더니 C씨의 마스크 구매 주문 내역은 없었다.
마스크 업체 역시 그날 오전 한전 관계자라는 남성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고압선 공사로 전화가 단절될 수 있으니 사업에 피해가 없도록 회사 전화를 인터넷 전화(070)로 착신을 변경하라”고 말했다. 마스크 업체에 걸려오는 전화를 사기범은 가로채 마스크 구매 주문을 받은 뒤 대금을 챙겼다.
경찰은 C씨 외에 또 다른 피해자도 확인했다. 인천의 한 유통업체도 같은날 18만장의 마스크를 주문하고 1억8000만원의 대금을 보냈다.
A씨 얘기도, 마스크 회사 내용도 훑어보니 어딘가 기시감이 느껴졌다. 모수 서울이나 경산묘목조합의 넘버피싱과 판박이였다. ▶관련기사 [7월 28일 '' 모두가 손놓고 모두가 모르쇠 했다…'착신전환' 피싱이 뭐길래"]
이 같은 넘버피싱 피해 사례들은 범죄의 유형부터 진행 과정이 동일했다. 기대와 다르게 전개되는 수사, 복구 되지 않는 피해도 같았다.
그리고 지난 2022년 전주지방법원에선 범죄의 피해자들이 어떤 결론을 맞게 될지 미리 보여주는 듯 했다.
그때 그 사건
지난 2020년 11월 전북 부안 지역에서 쌀을 도정해 판매하는 D업체는 이 지역 농협이 운영하는 미곡종합처리장에 전화를 걸었다가 약 2억314만원의 사기 피해를 당했다.
이 사건 역시 미곡처리장에 걸려온 한 통의 전화로 시작됐다. 전화 속 남성은 자신을 한전 직원이라고 밝힌 뒤 "선로 공사로 2, 3일간 전화를 이용할 수 없으니 자신이 지정하는 전화번호로 연결되도록 착신전환해야 한다"고 말했다.
D업체는 피싱 범죄자에게 연결된 줄도 모르고 미곡처리장인 줄 알고 전화를 걸어 벼를 매도하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물품을 거래할 때 수량·품질을 공식적으로 인증하는 계량증명서까지 받은 뒤 4563만원과 3422만원을 송금했다. 같은 날 추가로 3234만원, 4546만원에 4548만원을 보냈다. 다섯 차례에 걸쳐 보낸 돈은 총 2억313만원이었다. 받아야 할 벼가 오지 않자 D업체는 비로소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경찰에 신고한 뒤 D업체는 미곡처리장과 전화번호를 착신전환한 직원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다. 사기범행을 방조한 책임을 물어 손해를 본 원금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과는 허무했다. 가해자는 없고 피해자만 남았다.
2022년 11월 전주지방법원 제12민사부(재판장 남편 부장판사)는 원고인 D업체 공동대표에 대한 배상 청구에 '이유 없다'며 기각 판결을 내렸다.
외려 재판부는 피해자인 원고를 질타했다. 거액의 거래를 하는 데 신중하지 못해 사기를 당했다는 게 질타의 핵심이었다.
판결문에는 차량으로 30~40분 거리에 있는 미곡처리장에 가지도 않고 전화로 벼를 구매하고 거액을 보내는 걸 상식선에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기 범죄자가 팩스로 준 계량증명서에 허술한 게 많은 데도 눈치를 채지 못한 점도 지적했다.
수사를 진행한 경찰도 다르지 않았다. 전북경찰청 소속 사법경찰관은 한전 직원을 사칭한 범죄자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수사 중지 결정을 내렸다.
세월이 지나도 '신종' 범죄
올해 모수 서울의 전화번호를 도용한 피싱범죄 소식을 전할 때도, 2020년 마스크 업체의 전화번호로 사기 피해가 발생했을 때도 그 앞에 붙는 수식어는 '신종'이었다.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범죄를 유형과 패턴에 따라 구분해 '보이스피싱''로맨스스캠''스미싱'으로 구분해 수사당국이 대처한 것과는 사뭇 다른 전개였다. '넘버피싱'이라는 이름을 고심 끝에 붙인 것도 이 때문이었다.
비슷한 유형의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상황에서 그 패턴을 파악해 범죄를 예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주문이 나오기도 했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사법대학 교수는 "사기를 친 범인이 잘못한 건데, 착신전환된 전화번호가 범죄에 사용돼 금전적 사고를 냈으니 책임을 배분할 건지를 두고 법적 분쟁이 발생할 소지가 다분히 있다"며 "법적 판단이 필요한 상황에서 관련 범죄 유형에 맞는 법안 마련이 필요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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