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 맞았다"…물거품 된 밸류업 기대 [노정동의 어쩌다 투자자]
"'밸류업 프로그램'(기업가치 제고)을 스스로 걷어차는 것을 넘어 '밸류 다운'을 시키는 꼴이네요. 가뜩이나 외국에서 정치 불안에 대해 의구심이 컸는데 큰일입니다."
8일 국내 한 증권사 투자전략팀장은 비상계엄 사태와 관련해 "외국인들은 기존에도 북한 이슈 등과 관련해 과도하게 우려하는 경향이 있었다"며 "가뜩이나 국내 정치에 대한 신뢰도가 낮은 상황에서 이 같은 일이 벌어져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자인하는 꼴이 됐다"고 토로했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정국이 급물살을 타면서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자자의 자금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있다. 당국은 증시안정펀드 등을 언급하며 부랴부랴 투자자들을 달래고 있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 투자심리가 급격히 악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지난 6일 증시에서 대통령 탄핵 정국이 본격화되자 코스피지수 2400선이 무너졌고 코스닥지수도 650선을 내줬다. 코스피가 올 들어 장중 2400선 밑으로 내려온 것은 지난 8월5일 '블랙먼데이'와 미국 대선 이후인 11월15일 이후 세 번째다.
외국인은 지난 3일 비상계엄 사태 이후 유가증권시장에서 이틀간 7255억원어치의 주식을 순매도하며 지수를 끌어내렸다. 코스피 시가총액은 1999조원으로 지난달 15일 이후 14거래일 만에 다시 2000조원 아래로 내려왔다.
'계엄 쇼크'에 가장 먼저 무너지고 있는 건 밸류업 관련주(株)들이다. 지난 3일 계엄 이후 KB금융은 이틀 만에 주가가 15% 넘게 급락했다. 신한지주(-12.06%), 하나금융지주(-9.92%), 우리금융지주(-6.56%), 삼성화재(-10.14%)도 줄줄이 하락했다.
올해 국내 증시가 부진한 가운데서도 주주환원 여력이 높다는 이유로 밸류업 정책을 동력 삼아 업종 중에서 거의 유일하게 상승세를 보였던 금융주가 줄줄이 방향을 튼 셈이다. 특히 금융주는 외국인 투자 비중이 높아 자금 이탈 속도가 빨랐다.
개별 종목뿐 아니라 지난 9월 발표한 밸류업 지수, 그리고 이 지수를 바탕으로 지난달 상장한 밸류업 관련 상장지수펀드(ETF)들도 줄줄이 하락했다. 지난 9월30일 992.13으로 시작한 밸류업 지수는 지난 5일 971.51로 마감해 이 기간 2.08% 하락했다.
트러스톤자산운용의 'TRUSTON 코리아밸류업액티브'와 타임폴리오자산운용의 'TIMEFOLIO 코리아밸류업액티브'의 경우는 이날 하루에만 각각 1.90%, 1.05%씩 하락했다. 12개 밸류업 ETF는 지난 6일 기준으로 모두 마이너스(-)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금융투자 업계에 따르면 홍콩계 글로벌 증권사 CLSA는 지난 5일 컨퍼런스콜(전화회의)을 통해 "내년 한국 비중을 줄이는 것뿐만 아니라 비중 축소 시기를 앞당겨야 한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골드만삭스도 같은 날 '계엄 선호 및 해제 후 한국 증시 인사이트' 보고서를 통해 "한국의 잠재적인 실적 하방 리스크와 정책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당분간 변동성 높은 거래 환경이 지속될 것으로 예상한다"며 "잠재적 탄핵 표결까지 높은 수준의 변동성이 계속될 가능성이 있고 국내 정책 불확실성 등이 시장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계엄 후폭풍'에 이은 탄핵 정국 돌입으로 윤석열 정부의 핵심 공약 중 하나인 밸류업 정책 추진도 속도가 더뎌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김윤정 LS증권 연구원은 "정부가 적극 추진해온 밸류업 프로그램 등 자본시장 활성화 정책의 동력을 상실할 위험이 커졌다"며 "일본의 기업가치 제고 정책은 10년간의 기업 지배구조 개정 노력이 있었는데 연속성 있게 장기간의 노력을 들여야 안착이 가능한 정책 과제가 또 다른 국면을 맞게 됐다"고 지적했다.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6일 블룸버그TV와 인터뷰에서 "탄핵, 권력 교체, 정치적 불안정 여부와 관계없이 밸류업 프로그램은 계속될 것"이라며 "정치적 성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밸류업 프로그램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당분간 증시 변동성 확대를 우려했다. 특히 계엄 사태 이후 정계가 대통령 탄핵 국면으로 돌입할 가능성이 높아 증시 하방 압력이 불가피하다는 전망이다.
박상현 iM증권 연구원은 "가뜩이나 외국인들의 국내 금융시장을 보는 시각이 곱지 않은 상황에서 불거진 국내 정치 불확실성은 국내 금융시장의 대외 신인도의 하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일부 기업들을 중심으로 한 유동성 위기설 등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한국 경제에 대한 신뢰도 하락은 자금조달 리스크를 확대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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