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수가 문제다…한은, 기준금리 0.25%p ‘깜짝 인하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8일 오전 서울 중구 한은에서 열린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한국은행이 시장의 예상을 깨고 지난달에 이어 두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내렸다. 한은이 연달아 금리를 인하한 것은 지난 2009년 이후 15년 만이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금통위)는 28일 오전 서울 중구 한은에서 통화정책방향 회의를 열고 현재 연 3.25% 수준인 기준금리를 3.0%로 0.25%포인트(p) 낮췄다.
지난달 11일 기준금리를 3.50%에서 3.25%로 0.25%p 인하하며 3년 2개월 만에 피벗(통화 정책 전환)을 단행한 데 이어 또 기준금리를 내렸다. 이번 금리 인하로 한미 금리 격차는 최대 1.50%p에서 1.75%p로 다시 확대됐다.
한은이 두 달 연속 금리를 낮춘 건 지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처음이다. 한은은 2008년 10월부터 2009년 2월까지 여섯 차례 연속 기준금리를 5.25%에서 2.00%까지 내렸다.
“환율 변동성 우려에도 경기 부양 우선”
시장에서는 한은이 이번 달 금통위에서 금리를 묶을 거라는 시각이 우세했다. 지난 26일 금융투자협회가 채권 전문가 1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응답자 83%가 동결을 전망했다.
시장이 기준금리 동결을 예상한 이유는 불안한 환율 때문이다. 이달 초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미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이후 미국 물가·금리 상승 기대 등으로 달러가 강세를 보이자 원‧달러 환율이 뛰기 시작했다. 원‧달러 환율은 지난 13일 장 중 1410원 선을 넘어 2년 만에 최고 수준에 이른 뒤 1400원대를 오르내리고 있다.
한은의 기준금리 인하로 미국과 금리 차가 벌어지면 환율 부담이 더 커지는 상황에서 미국이 금리 인하 속도를 늦출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어 한은이 섣불리 금리를 더 내리기는 어렵다고 시장은 봤다.
한은이 시장의 전망에서 벗어난 ‘깜짝 인하’를 선택한 이유는 내수 침체에 수출 불확실이 더해진 상황 등이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금통위는 통화정책방향 회의 의결문에서 기준금리를 하향 조정하게 된 배경에 대해 “환율 변동성이 확대됐지만 물가 상승률의 안정세와 가계부채의 둔화 흐름이 이어지는 가운데 성장의 하방 압력이 증대됐다”며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해 경기의 하방 리스크(위험)를 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금통위는 향후 통화 정책 방향에 대해 “금리 인하가 물가와 성장, 가계부채와 환율 등 금융 안정에 미치는 영향과 정책 변수 간 상충 관계를 면밀히 점검하면서 앞으로 인하 속도 등을 결정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한은은 이날 수출 둔화와 내수 부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2기 정부 출범 리스크 등을 반영해 올해와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각 2.2%, 1.9%로 0.2%p씩 낮췄다. 오는 2026년에는 성장률이 1.8%로 더 내려갈 거라고 봤다.
1954년 국내총생산(GDP) 통계 집계 이래 성장률이 2%를 밑돈 때는 1956년(0.6%), 1980년(-1.6%), 1998년(-5.1%), 2009년(0.8%), 2020년(-0.7%), 2023년(1.4%)뿐이다. 외환위기, 세계 금융위기, 코로나19 사태 등 충격이 있던 시기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가 28일 서울 중구 한국은행에서 열린 금융통화위원회를 주재하고 있다. 출처=한국은행
유상대‧장용성 ‘동결’ 주장…20년 만의 부총재 소수의견 등장
이창용 한은 총재는 이날 금통위 직후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지난달 금통위 이후 대내외에 많은 변화가 있었고, 소수 의견이 나온 데서 알 수 있듯 인하와 동결 모두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어려운 결정이었다”라며 “(지난달에 이어) 기준금리를 추가 인하해 성장의 하방 리스크를 완화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결정했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기준금리를 0.25%p 인하하면 경제성장률이 0.07%p 높아지는 것으로 추정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신정부의 경제 정책 방향에 따른 경기 및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등의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기준금리 조정에 대한 금통위원의 의견도 엇갈렸다. 이 총재를 제외한 위원 6명 가운데 4명이 인하를, 2명은 동결을 주장했다.
동결 소수의견을 낸 금통위원은 유상대 부총재와 장용성 위원이었다. 지난달 유일하게 동결 의견을 낸 장 위원은 이번 달에도 2연속 소수의견을 냈다. 이 총재는 “물가와 가계부채 상황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견해차가 크지 않았지만 성장과 외환시장의 안정 간 상충관계에 대해 많은 고민과 논의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당연직 금통위원인 한은 부총재가 기준금리 결정과 관련해 소수의견을 제시한 것은 2004년 11월 이성태 당시 부총재 이후 20년 만에 처음이다.
3개월 후 기준금리에 관한 의견인 ‘포워드 가이던스’에 대해서 이 총재는 “금통위원 6명 중 3분은 향후 3개월 내 연 3.00% 수준으로 금리가 유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며 “나머지 3명은 3.00%보다 낮은 수준으로 기준금리를 인하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한다는 의견”이라고 했다.
지난 10월 금통위원 6명 중 5명이 향후 3개월 내 3.25%를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금통위 내부 여론 지형이 크게 바뀐 셈이다.
이창용, 차기 총리설에 “답변 준비했다”
기준금리 인하에 따른 원‧달러 환율 상승 우려와 관련해 이 총재는 “환율 변동 수준이 아니라 환율 변동성에 금리 결정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 아주 많은 논의를 했다”며 “환율 변동성을 관리하는 데 외환 보유고가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는 “환율 변동성 관리 수단이 많다”면서 “예를 들어 국민연금과의 외환스와프 액수를 확대하고 기간을 재연장하는 일을 논의 중”이라고 부연했다.
환율 관리 방향에 대해서는 “특정 환율 수준보다는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본다”며 “특정 수준을 목표로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 총재는 “특정 환율 수준을 위기라고 말하기에는 우리나라 외환시장 구조가 많이 바뀌었다”며 “우리가 더는 외채를 많이 진 나라가 아니고, 내국인의 해외 투자도 늘었다”고 진단했다.
그는 “환율 수준보다는 (절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고 본다”면서 “다행히 ‘트럼프 트레이드’가 숨을 고르는 모습을 보이며 최근 원화 절하 속도가 다른 통화에 비해 크게 빠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이 총재는 “우리나라와 수출 경쟁 관계인 일본 엔화, 중국 위안화가 기본적으로 절하 압력을 가장 많이 받고 있다”며 “우리에겐 절하 속도를 조절할 충분한 의지와 수단이 있다”고 덧붙였다.
기준금리 인하로 부동산 가격 상승세나 가계부채 증가세가 확대될 수 있다는 우려에는 “금리가 내려가면 부동산 가격이나 가계부채 증가세에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지난 8월 한은이 기준금리를 동결한 뒤 정부의 거시 안정성 정책이 도입돼 (상승) 동력을 막았다”고 말했다.
그는 “11월 이후에도 가계대출은 주택거래량 감소, 거시 건전성 정책 영향 지속 등으로 당분간 둔화 흐름을 유지할 것”이라며 “앞으로 부동산 가격 상승세와 가계부채 증가세를 지켜보며 금리 인하 시기를 조정해 나가겠다”고 전했다.
이 총재는 차기 국무총리 후보로 거론되는 상황에 대한 의견을 묻자 “경제 상황이 녹록지 않은 만큼 한은 총재로서 맡은바 현재 업무를 충실히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준비한 문구를 읽었다.